둘밖에 없는 은신처는 무료하다. 이곳에 틀어박히기 전까지는 그래도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는 가면라이더 크로니클에 관련된 일뿐이다. 아무렇게나 어질러져 있는 게임기들은 모두 파라드를 위한 것이다 보니, 지금의 쿠로토에게는 별다른 여흥 거리조차도 되지 못했다. 개발하면서 수백 번도 더 플레이해본 게임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겐무, 심심해."
소파에 늘어져 게임기를 만지작대던 파라드가 투덜댔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슬슬 할 게임이 없다고 불만스러워하던 했지.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그를 위해 게임을 개발할 여력도 없다. 적당히 사 왔던 게임을 던져주는 것도 슬슬 한계에 달한 것 같은데. 호죠 에무와 놀만 한 요건도 안 되고, 크로니클은 아직도 미완성. 왼쪽으로 한번, 오른쪽으로 한번 몸을 굴리던 파라드가 입을 열었다.
"심심풀이라도, 할래?"
아, 결국에는 또 그거다.
버그스터가 원래 그런 건지, 파라드가 유독 그런 특성을 지닌 개체인 것인지. 그는 유난히 심심한 걸 싫어하고 재미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 그리고 그 재미있는 것을 끊임없이 찾고, 찾고, 또 찾은 끝에 지난번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쿠로토였다.
"그쯤 했으면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날 시간 때우기 용도로 써먹는 건 그만두지 그래."
"딱히. 별로 질린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옷 사이로 성급하게 기어들어 가는 손을 떨쳐낸 쿠로토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을 잡자 어깨가 펄쩍 뛰었다. 시선을 맞추자 황급히 숙인 고개 양옆으로 삐죽하니 나온 귀가 새빨갛다. 저런, 단순히 손을 마주 잡은 것만으로도 벌써 이러면 앞으로는 어쩌려고. 쿠로토의 입가에서 가벼운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정말이지 이 젊은 연수의는 지나치게 알기 쉬운 사람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을 반짝거리며 '쭉 동경해왔습니다! 팬이에요!'를 외치는 것에서부터 짐작했지만, 호죠 에무는 명백히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주는 팬에게 매몰차게 대할 이유도 없는지라, 몇 번 팬서비스 비슷한 걸 해준 것이 다였는데. 어느새 이 남자는 쿠로토 앞에서 짝사랑에 설레는 중학생 소년처 얼굴을 새빨갛게 붉혀대고 있었다.
단지 그 반응이 재밌었을 뿐이다.
"왜 그러시나요? 호죠 선생님."
"아뇨, 그... 어, 아, 그냥 에무라고 부르셔도..."
"...그럼 에무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무, 무무무물론이죠! 어설프게 웃는 얼굴이 제 귀엽다. 애써 신경을 돌려보려는 듯 황급히 손을 뺀 에무가 유리잔에 담긴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렇게 마시는 술이 아닌데. 순식간에 잔을 비운 에무가 숨을 몰아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이렇게나 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사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만, 제가 정말 이런 걸 받아도 될지..."
정 뭣하면, 제가 선생님께 드리는 개인적인 호의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이어지는 말에 에무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혼란스럽게 굴러가는 눈동자가 흘깃 보였다. 예상한 대로 멋지게 먹혀들어 간 대사에, 쿠로토는 즐거운 기분으로 제 앞에 놓인 아뮤즈 부쉬를 느긋하게 맛보았다.
파라드 X 단 쿠로토 / 음악대학 AU / 126p / A5 무선제본 / 전연령가 / 10000원
라키아(@aikar_rakia)와 겨울(@hiemislee)의 트윈소설본이며, 릴레이형식으로 쓰인 책입니다.
수량조사분량+현장판매분 소량으로 들고 갑니다.
상·하편 중 상편에 해당되는 책이며,
하편인 <Concerto. R Postlude>는 2018년 4월 쩜오이벤트 발간 예정입니다.
하단부는 최종 샘플입니다.
*겨울
시체 냄새가 났다. 그건 명백하게 죽음의
냄새였다. 강당 안은 삽시간에 사체가 피워내는 오싹하고 불쾌한 감정으로 가득 찼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안개가 피어오른다. 경쾌한 불협화음과 함께 연주가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가볍게 튀어 오르는 음들이 달그락거리며 뻣뻣한 춤사위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저 남자가 있었다. 연주자로
불려 나온 그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하얀 얼굴로 유려하게 건반 위를 미끄러지고 있다. 건반 위에서 날뛰고 있는 것은 백랍처럼 하얀 열 개의 백골들. 리스트가
편곡한 피아노 버전의 댄스 마카브르다. <동물의 사육제>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카미유 생상스의 교향시. ‘죽은 자의 춤’이라는 어두운 제목과는 달리 목관악기들과 금관악기, 바이올린으로 빠르고 경쾌하게 악상이 전개된다. 전염병과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던 중세, 유럽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뒤에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죽음에게서 두려움의
이미지를 덜어내기 위해 죽은 자를 소재로 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한다. 그 수많은 이야기를
소재로 작곡가는 한때 삶을 영위했던 이들이 새벽 어스름 속에 일어나 마음껏 춤추는 묘지의 연회를 만들어냈다.
그
의도와 생각을 그대로 읽어낸 듯, 연주자는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자유로이 오르내리며 생을 잊은 자들의
즐거운 춤사위를, 묘하게 광기에 차 사지를 흔드는 모습들을 솜씨 좋게 그려내고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라는 명목만 붙어있지 않았으면 대호평을 받아 마땅할 연주회였을 것이다. 물론 연주회에 음산한 곡을 올리지 말라는 법은 없었지만, 세상에는
‘상식’과 ‘예의’라는 것이 존재한다. 결혼식에는 축가를, 장례식에는 진혼곡을. 그러니 신입생 환영회라는 타이틀을 단 무대에는
봄이나 밝은 주제의 곡을 들고나오는 것이 상식적으로 올바르다. 어느 세상의 누가 새 출발을 시작하는 1학년들 앞에 죽음의 이미지를 들고나오겠는가? 이 대담하고 어찌 보면
뜬금없는 선곡의 이유는 뻔할 터였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게 된 연주자의 소심한 불만 표시던지, 아니면 이제부터 시작될 대학 생활의 환상을 깨주겠다는 나름 고상한 형태의 꼰대질이던지, 어느 쪽으로 생각하나 죽음의 무도를 들고나와 연주 중인 작자는 성격이 창자까지 배배 꼬인 이상한 선배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연주는 그런 악의적인 의도를 가정해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퍼포먼스였다.
파라드는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우와…”
옆자리에서 작게 터지는 탄성에 그는 미간을 잔뜩 구겼다. 연주에 점점 속력이 붙는다. 교향시 규모의 악곡을 피아노 한 대로
압축한 데다 기교로 유명한 리스트의 편곡이다. 자칫 잘못하면 미스터치가 나오기 쉬운 난이도임에도 연주자는
각각의 음들이 뭉그러지지 않고 정확하게 제 소리를 내도록 연주하고 있었다. 확실히 완벽한 연주였다. 댄스 마카브르는 이렇게 연주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이 강당 안의
모든 사람이 넋을 잃고 집중하고 있다. 그중에는 파라드가 각별히 아끼는 사촌, 호죠 에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파라드는 불만스러웠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그는 이 사태를 한 문장으로 일축했다.
연주자의 실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유명한 콩쿨에서 여러 번 우승을 휩쓸었을
법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 완벽함 때문에
느껴지는 위화감도 있는 것이다.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음의 연속. 독무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파라드는 그 모양새를 가만히 응시하다 일순 치밀어 오르는
토기에 고개를 잔뜩 수그렸다. 저 남자는 너무 완벽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연주엔 주장이 없다.
파라드는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개성과 주관을 절제해버린 연주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검을 맞대보면 서로의 진심을 안다는 말도 있고,
작품을 보면 작가를 안다는 이야기도 있듯이 연주에는 연주자가 담긴다. 그러나 이 댄스 마카브르엔
어디에도 남자의 흔적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해골들과, 가라앉은
음산한 밤의 풍경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잘 그린 그림과도 같았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림이 실제를 잘 묘사한다 하더라도 진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연주는 그 자신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듯하면서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저기 앉아있는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파라드는 간단하게
정의했다. 저 연주자는 시체다. 텅 빈 껍데기가 따닥거리며
건반을 누르고 있다.
“...퍽도 지 같은 곡을 들고 나오셨네.”
생기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생을 연기하고 있다. 무덤가에서 살아있는 무희처럼 춤추는 해골을 표현하기엔 너무도 적합한 연주자다.
자기소개 수준이었다. 검은 피아노 검은 정장, 먹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에 이질적일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얼굴과 손가락. 그 모든 것이 잘 만들어진 도자 인형
같았다. 태엽을 감으면 정해진 동작 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인형.
파라드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저런
연주를 좋아라 하며 박수치는 놈팽이들도, 그리고 그런 멍청이들의 웃음과 열망을 위해 한껏 살아있는 것처럼
기교를 부리는 예쁘장한 얼굴의 자동인형도 전부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조롱당하는 기분이다. 이 모든 것이 눈앞의 망할 자식이 자기를 비웃기 위해 벌여놓은 희극의 제1막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이젠 한계다.
현기증이 났다.
그는 얼굴을 쓸어 올렸다. 옆자리의
에무가 왜 그래? 라고 물어온다. 더 못 들어주겠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설임 없이 문으로 향했다. 힘껏 열자. 자유의 바람이 그를 맞이한다. 서둘러 발을 내디뎠다.
-쾅
그
묵직한 소음과 함께 파라드는 재빨리 끔찍한 연주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나긋나긋한 얼굴로
건반을 어루만지던 연주 인형도. 깔끔하게 지우려고 했다. 그래야
했다.
*라키아
시선이
서로 스쳤다. 숨을 동시에 들이켜자, 고요한 공기를 두 개의
선율이 가로지른다. 직전까지 한껏 들떠 올랐을 2악장과는
다르게 첫 소절부터 애상적인 3악장, 라르고. 잔잔하고 애달픈 주선율을 첼로가 먼저 자아낸 다음, 피아노가 다시
한번 그 멜로디를 섬세히 흘려보내며 시작하는 곡이다. 파라드가 느릿하게 현을 그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악장에 비해 조금 심심한 파트였기에 그렇게 자주 연주했던 곡은 아니었지만, 소절 하나하나마다 담긴 슬픔을 그만의 비브라토로 표현해내는 데에는 꽤 자신이 있다고 해도 좋았다. 부드럽게 현을 떤 다음 짙게 남은 음의 잔향을 즐기고 있으면, 바로
피아노가 조심스레 걸어 들어오는 초반부.
"───?"
한
호흡 쉬며 피아노를 기다리던 파라드가 멈칫거렸다. 곡은 어느새 뚝 끊겨 있었다. 활이 힘없이 현을 스치다 떨어져 나갔다. 고개를 돌리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꾹 다물어진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왜 멈추는 건데?"
쿠로토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흰 건반을 문지르다, 아뇨, 다시 하죠. 라고 내뱉었다. 시작한 지 30초도
안 됐는데 벌써 흐름이 끊긴 것이 불만스러웠지만, 아직 시간은 많았다.
파라드는 다시 활을 가져다 대었다. 설마 이번에도 멈추겠어.
하지만
늘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파라드, 라고 했던가요."
그다지
친근한 울림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름이 입에 담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피아노 쪽을 바라보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쿠로토와 눈이 마주쳤다. 할 말이, 그것도 파라드의 연주에 굉장히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더군다나
한숨까지 누구 들으란 듯이 크게 쉰다면, 이윽고 열리는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어떤 내용일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 연주는 대체 뭐죠. 감정이 너무
과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데."
한심하다는
얼굴로 사람을 훑어보는 시선에 파라드는 슬며시 짜증이 들기 시작했다.
"흐느적흐느적, 아주 신파극을 찍는군요."
"────뭐?"
"이건 소나타지, 탱고가 아닙니다. 도입부부터 감정 과잉에, 정말."
쯧, 하고 혀를 차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자기가 교수 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어느새 팔짱까지 끼고 있는 모습은 누가 본다면 영락없이 지금이 연습이 아닌 레슨시간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훅 나빠지는 기분에 목소리가 어느새 깊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
참자. 그래도 쿠로토는 과가 다를지언정 선배였다. 더군다나 반주를 먼저
요청한 건 파라드 자신이었다. 비록 저 자식이 꼰, 아니, 아주 약간의 선생질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말을 들어 나쁠 것은
없었다. 없을 것이다. 아직 전체를 연주해보기는커녕 채 30초도 맞춰보지 못한 마당에, 언쟁을 지속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목구멍 틈새로 비어져 나오는 불만을 억지로 누르며 내뱉자, 쿠로토의
표정이 아주 약간 풀렸다.
"감정 빼세요. 도입부부터 심취해서 날뛰지
말고, 조심스럽게."
일단은
저 말에 맞춰 줘야지. 파라드는 퉁명스레 알았어, 라고 답하고
다시 활을 들었다.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선율 하나하나가 깨질세라 심혈을 기울이느라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다.
도입부를 넘기고, 피아노와 시프트 해서 다시 반복. 그리고
다시 첼로의 순서가 돌아온다. 평소 전혀 생각하지도 않던 방식의 연주에 숨이 턱턱 막혔다. 평소엔 여기서 시원스레 달려나갔는데, 굼벵이 기어가는 듯한 선율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거기다가 그 느릿느릿하고 지루한 흐름을 받쳐주는,
이 끔찍하게 재미없는 피아노란. 좀이 쑤셔 죽을 것 같은 기분에, 참다 못한 파라드가 활에 조금 힘을 실었다. 이러다가는 질식할 지경이었다. 여기는 평소처럼 비브라토를 세게 넣고, 약하게 긋다가 팔에 힘을
실어 강하게 긋고. 이래야 좀 재밌지. 조금 즐거워진 파라드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좋아, 여기서는 조금 더 격정적으로───, 라고 숨을 마시려던 찰나, 공기가 썰렁했다. 피아노가 또 사라졌다. 음에 취해 감았던 눈을 뜨자, 파라드는 자신을 정면으로 노려보는 눈동자와 마주했다.